데미안을 읽는 관점은 다양하다. 성장소설로 읽을 수도 있고, 실존주의 철학적 관점에서 볼 수도 있으며, 상징주의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어떤 관점으로 읽든 풀리지 않는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분석심리학(융 심리학) 관점에서 읽었을 때 가장 납득이 갔기에 이 글에서는 그에 따른 감상을 써보려 한다.
분석심리학에서 인간의 정신은
의식 → 개인적 무의식 → 집단 무의식
의 순서로 점점 더 깊어진다.
의식은 인간이 자각하고 있는 모든 정신 활동을 말하며, 그 중심에는 ‘자아(Ego)’가 자리한다. 개인적 무의식은 의식에서 밀려난 억압된 정신의 영역으로, 곧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 나의 모습”이 담긴다. 칼 융은 이를 ‘그림자(Shadow)’라 명명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층위인 집단 무의식은 인류가 오랜 시간 공유해 온 정신의 원형들이 자리한 곳으로, 인간이 학습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원형(archetype)’이 이곳에 존재한다고 한다.
소설 데미안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프란츠 크로머 일당은, 싱클레어의 개인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그림자’에 해당한다. 이들을 몰아낸 것은 데미안이지만, 싸워서 쫓아낸 것이 아니라 소설의 표현대로라면 ‘좋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도록 이끄는 ‘구도자’ 역할을 한다.
“Ich habe ihm gesagt, was ich davon denke. Und das hat ihm genügt.“
(“나는 그에게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했어. 그걸로 충분했지.”)
크로머, 카인, 도둑질과 같은 요소들은 무조건 억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정말 나쁘기만 한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마주해야 할 것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무작정 수용해도 된다는 뜻일까? 작가는 그림자가 싱클레어를 삼키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자를 잘 달래어 자아와 통합하면(이를 융은 ‘선악의 통합’이라 부른다), 한층 더 성숙한 자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데미안은 그 통합의 상징이자 결과물인 셈이다.
이 소설은 내면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이를 억누르거나 부정하는 대신 통합해 나가야 성숙한 자아로 성장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신의 단점을 인식하게 되는데, 20대에는 그런 단점들이 싫어 발버둥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안고 가야지’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 단점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더 나은 자신이 되어간다. 상징과 신비주의로 겉을 감싸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쩌면 데미안도 그런 이야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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